로마서 1:14-17 복음으로 사는 삶

본문 14절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빚진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빚을 진 대상을 말하기를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들은 그 당시의 사회의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표현이죠.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빚진 자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빚진 자라는 것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죠? 빚을 지게 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세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빚을 지게 된 사람은 빚을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집을 사기 위해서나 사업 등을 위해 은행을 통해 돈을 빌린 경우 같은 것을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있는 그대로 빚을 진 것을 생각해야 겠죠. 빚을 진 경우는 쉽게 말하면 어떤 곤경에 빠졌던 경우입니다. 그 곤경을 빠져나오기 위해 빚을 지게 된 것이죠. 신앙적인 면에서 곤경에 빠진 것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처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이 그러한 곤경을 벗어나게 되었으니 다시 그 구원자에게 빚을 지게 된 것이죠.
두 번째는 빚을 진 사람은 갚아야 하는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빚을 진 사람이 그 빚을 갚지 않으면 그 빚으로 인해 화를 당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빚을 진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자신이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함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빚을 갚지 않으면 화를 당하게 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행하는 것이 자랑할 일이 아닌 것이죠. 그저 당연히 행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빚을 진자는 그 빚을 갚은 후의 기쁨이 있습니다. 빚을 지고, 그것을 갚아야 하는 부담감을 가진 사람이 그 빚을 다 갚게 되었을 때에 기쁨은 너무나 큰 것이겠죠? 그러므로 사도바울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으로 인해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은 너무나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빚진 자로서 그것을 갚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으셨나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주님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원리는 바울의 경우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사명을 주셨고, 그는 그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명이 바로 자신이 받은 은혜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사도바울처럼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도 그 은혜의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은 빚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우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에 이 복음을 부끄러워함으로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사도바울의 시대에도 복음을 부끄럽게 여길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헬라철학이 왕성하고, 물질적인 부유함과 엘리트주의가 지배하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가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임을 전하는 복음은 미련한 것으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비록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그가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올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고, 나무에 달려 죽은 자가 메시아임을 믿는 것은 매우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부끄러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비록 이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처럼 보이고 들릴지 몰라도 이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을 생각할 때 누가 그것을 거리끼게 말하든, 미련하다고 여기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어떤 지혜와 율법적인 행위는 사람을 구원할 능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돌아보길 원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나요? 조금만한 어려움에 왜 그렇게 쉽게 굴복할까요? 우리의 복음을 연약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과연 우리의 모습을 그 복음이 능력을 믿고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시점에서 저는 15절의 말씀을 여러분과 제가 주목하여 보기를 소망합니다. 15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로마교회는 사도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가기를 원하는 이유를 말하면서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구원받았어도 여전히 복음을 전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17절로 가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으로 구원받아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복음의 기능이 다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도 복음을 되새기면서 죄악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복음을 믿음으로 사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죄를 미워하셔서 죄의 결과는 사망이었지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사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게하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오직 이 구원의 일을 위해 믿음만을 요구하십니다. 그 구원받은 자의 삶은 오로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것처럼, 오늘도 그 복음을 믿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십자가의 복음으로 감격하고, 감사하고, 뜨겁게 사명을 감당하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복음으로 고난을 이기고,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