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9-26

본문은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는 고난주간의 화요일에 해당되는 날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화요일에는 여러 종교지도자들의 과의 논쟁이 있었던 날입니다. 그런데, 이 논쟁들은 결국 이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에 대한 미움을 불러 일으켰고,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같은 계획을 쉽게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던 것은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정당한 이유와 방법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인기를 잃게 만들거나, 혹은 로마 정부에 의해 미움을 받아서 총독에 의해 처벌을 받게 하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예수님께 했던 질문이 바로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였습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친다는 것에 대해 옳은지 옳지 않은지 묻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은 분명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을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은 정치, 군사적으로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고, 로마제국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식민지의 백성들에게 소위 “인두세”라고 부를 수 있는 세금을 내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1년 1인당 한 데나리온을 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로마제국이 요구하는 인두세를 유대인들이 순수하게 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인두세를 내는 것은 사실상 그들의 식민통치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여겼기 때문에 자신들이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열심당등 종교적으로 보수적이고, 반로마적인 사람들은 이 인두세를 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반명에 헤롯당을 비롯하여 친로마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기꺼이 한 성인 남자의 품삯에 해당되는 한 데나리온을 인두세로 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가이사에게 인두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옳지 않은지를 말입니다.
이것은 두가지 차원에서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기에 좋은 질문이었습니다. 우선 그들이 원하는대로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인두세를 바치지 말라고 말하면, 이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통치자에게 고소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들도 내지 않지만 예수님을 인두세를 내지 않도록 사람들을 충동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로마 정권에 의해 체포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혹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지 않으시고 가이사에게 인두세를 바치라고 말씀하신다면 이들은 이것을 통해 그를 따르는 수많은 유대인들과 그와의 갈등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로마의 식민통치를 인정하는 사람으로 유대인들에게 매국노와 같이 정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의 반응을 들으려고 그 질문을 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 외에도 많은 백성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질문에 답하시는 것을 그들과 함께 듣게 되는데,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간계를 아셨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들이 인두세를 낼 때에 사용하는 데나리온 하나를 보여달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데나리온에는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가이사의 형상과 함께 “신성한 아우구스투스 아들 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사”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로마 황제를 신의 아들로 받드는 우상 숭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데나리온을 인두세로 바치는 것은 두 가지 면이 다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로마의 황제를 신적인 존재로 올리는 우상숭배를 인정하는 것의 의미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정부에 바치는 한 데나리온에 쓰여진 글과 형상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그들이 인두세로 로마제국에 내는 한 데나리온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신 후, 당신이 받으신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에 대한 결론적인 답을 그들에게 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대답은 우선 그들이 예수님을 책잡으려던 의도를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우선 로마제국에 내는 인두세를 내지 말라하시지 않았기에, 그들이 인두세를 거부하는 것으로 로마제국에 고발하는 것을 실패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인두세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라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유대인들이 가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중심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셨기에 유대인들에게 매국노의 모습으로 비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곤경을 피하신 언변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이 한마디의 말씀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이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이사가 그려진 데나리온의 형상은 우상숭배와 세상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전에는 그런 가이사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물질에 관한 것이니까,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을 드리는 것도 이러한 소유권 인정에 대한 좋은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바친 헌신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처럼…. 이 세대의 가이사에게 우리 몸을 바치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보혈의 피로 값주고 사신 주님 앞에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