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육신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서 치료하지 못하는 병이 없다고 해도 100세를 넘게 사는 사람도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 저는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길을 걷다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모태신앙으로 어릴 적부터 주님을 알고 신앙 안에서 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 시절에 주님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중년의 나이에, 어떤 사람은 노년이 되어서 구원을 받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비록 믿은 시기, 그래서 구원을 받은 시기는 다를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육체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입니다.

욥은 상상도 하기 싫은 엄청난 재앙을 만났습니다. 비록 그가 그런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께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잃지 않았을지라도 그 재앙 속에서 받는 고통은 너무나 컸습니다. 본문 2절에서 3절 상반절에 보면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은 마치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겨냥하여 화살을 쏘신 것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욥의 고통이 더해지는 것은 세 친구의 발언 때문입니다. 본문의 앞서 있는 그의 세 친구 중 한명인 엘리바스의 충고는 욥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욥의 고통을 그의 죄로 인한 형벌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간구하여 회복을 받으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이 엘리바스의 말은 동의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욥은 차라리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가시기를 간구합니다. 차라리 그것이 엄청난 고통 가운데 있는 자신에게는 위로와 기쁨이 될거라고 말합니다.
욥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가 살아온 인생의 길 때문에 그렇습니다. 욥은 그의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으며 살기를 원했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이 고통 중에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면 위로와 기쁨입니다. 그 고통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신실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지 않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며 동시에 그러나 그 고통이 너무나커서 죽어서라도 고통이 끝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에 담긴 욥의 마음에 너무나 가슴이 뜨겁습니다.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 중심의 인생관이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욥에게 있어서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생입니다. 죽음도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여주셔야 죽는 것입니다. 인생도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사는 것도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변함없이 살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중, 너무나 감당못할 고난을 만났지만 추호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삶의 환경에 오늘도 흔들리고 내일도 신앙이 흔들리는 우리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생의 주인이 자신인 것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하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기회를 주신 것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변치않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